Umberto Eco (English Translation: Richard Dixon)
2014 (Original 1980)
Mariner Books
갱신 2022. 5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중세역사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학문적 깨달음을 대중들에게 전파하고자 쓴 추리소설. 학술적 내용을 소설로, 그것도 추리소설로 썼다는 것 자체가 대중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다. 이 책의 판매고가 그 시도의 성과를 증명해주긴 하지만, 중세언어인 라틴어와 지독히도 긴 서술이 난무하는 이 책은 절대로 읽기 평이한 내용이 아니다.
모로는 기호학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는데, 라틴어는 커녕 영어도 짧은데다가 유럽의 중세신학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는지라 책의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저자가 이 책으로 의도하는 바를 추측해서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들에게 세상 만물과 만사는 기호와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 해석은 맥락이 필요하다. 그 맥락은 해석하는 사람의 지적 수준과 지식의 종류 뿐 아니라, 그가 가진 가치관과 그가 속한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대상도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이유다. 그렇게 해석이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의견충돌에 그치고 마는 경우도 있지만, 그 충돌로 인해 살인이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석들이 충돌하는 양상을 하나의 이야기로 담아낸 것이 이 책인데, 저자는 이야기 자체 뿐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건들, 묘사되는 인물과 풍경, 심지어는 인물들 간의 대화 내용과 그 형식조차 해석의 대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서술이 길다.) 어떤 해석을 하건간에 해석의 내용은 독자의 몫이지만 이 모든 것들을 설계한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모로로선 불가능했다. 수수께끼를 낸 사람의 의도와 수수께끼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문제풀이를 시도한 셈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모로가 내민 답이 오답은 아니라는 것을, 애시당초 정답이란 건 없다는 깨달음을 책을 다 읽은 보상으로 손에 쥐어준다. 출제된 문제의 정답을 몰라서 헤매지만, 문제를 풀어는 보겠다고 끝까지 버텼더니, 문제지 맨 끝에 작은 글씨로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원래 없다.'고 써 있는 걸 발견한 셈이다. 이 허탈하고도 교묘한 덫은 오로지 다 읽은 자만이 빠지는 덫이다. 인생사가 허무하다는 것도 덤으로 가르쳐주는 책이다.
이 책은 1980년에 이탈리아어로 출판된 소설의 영어 번역본이다. 소설 속 라틴어는 의도적으로 번역되지 않았다.
Umberto Eco의 책들 말고 기호학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 책이 또 있나 싶다. The Name Of The Rose는 Eco의 소설 중에서도 대중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얻었다. 이유는 기존 대중소설들의 인기 요소들을 노골적으로 차용하면서도, 그 요소들의 조합이 신선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대중소설로 읽히더라도 무방하도록 설계됐지만, 그렇다고 무협지나 하이틴로맨스처럼 말초신경을 자극할 목적으로만 쓰여지진 않았다.
라틴어나 어려운 영어단어의 뜻을 알아내려고 애를 쓰는 대신 소설 속 사건만 따라가다보면 꽤 읽을만 하다. 특히 소설의 후반부는 몰입도가 매우 높아진다. 문체가 아니라 사건의 흐름이 흥미를 자아낸다는 이야기다.
고증된 종교적, 철학적 토론이 담긴 내용들은 지적 호기심보다는 지적 허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책을 장식용으로 사는 소비자들도 많다. (출판사 입장에선 장점이다.)
라틴어를 모르면 소설 내용을 이해하는데 제한이 크다. 절대 다수의 독자가 라틴어를 모르는 걸 알면서도 Eco는 라틴어 문장들을 고수했는데, 이것은 소설이 쓰여진 의도에 충실한 행동이긴 하지만 무식한 독자 입장에선 자신이 무식하다는 비난의 글자들을 스스로 읽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
서술이 매우 길다. 인물들 간의 대화도 비현실적으로 길다. 저자는 중세 수도승들의 대화가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걸 납득한다 하더라도 불친절한 글쓰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저자는 그 정도 서술길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만 자신의 소설을 읽을 독자로 설정했다고 후기에 밝히기도 했다.
한글 번역본은 이탈리아어 뿐 아니라 라틴어도 한글로 번역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각종 전문적인 내용들을 각주에 해설했다. 번역자와 출판사의 친절한 태도이긴 하지만 저자는 달가워하지 않을 태도다. 독자로 하여금 해석되지 않은 기호를 스스로 해석하도록 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틴어 부분을 일일이 번역해 놓으면 읽을 수야 있지만, 종교나 철학에 충분한 지식이 없으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 도리는 없다. 게다가 번역하면서 의미가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저자가 중세사료를 짜깁기해서 옮겨놨다는 이 라틴어 부분은 차라리 번역하지 말아야 했다고 본다.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한 이윤기는 로마의 가톨릭 신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고, 라틴어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의 라틴어 번역은 독자들에 대한 배려 이외에도 본인의 지식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있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성심성의껏 번역했고 한 번 번역해서 출간했다가 시간이 지나 또 다시 번역을 다듬어서 재출간하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세유럽의 언어를 한국에서 80년대에 쓰던 한자어와 옛스러운 표현들로 번역했기 때문에 읽는 사람들로서는 적응이 필요하다.
1986년에 기가막힌 캐스팅으로 영화화됐다. 중년의 숀 코너리와 십대 소년 크리스챤 슬레이터, 그리고 기괴한 외모를 십분 활용한 론 펄먼의 훌륭한 연기를 볼 수 있다. 원작의 설정들을 거의 그대로 옮겨놨지만 대중성을 해치는 요소인 긴 서술과 대화들을 모두 걷어낸 덕분에 훨씬 쉽게 추리극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보면 내용이 더 잘 이해된다. 2019년에는 유럽에서 TV시리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평단의 찬사에 비해 아래 적은 모로의 평점은 점수가 꽤 낮다. 사실 모로가 이 책의 내용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가 불가능하다. 중세신학이나 유럽의 역사적 인물들이 했다는 말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모로에게 그것들은 그저 장식에 가깝다. 저자가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여 조각한 장식. 이 작품에서는 본질과 장식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지만, 그 관계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이 책은 그저 꽤 그럴듯해 보이는 중세 추리소설일 뿐이다. 추리소설로서 이 책을 평가하자니 아래와 같은 점수다. 책의 3분의 2를 견뎌내야 겨우 재미를 주는 추리소설에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다. 평가란 것은 평가하는 사람과 대상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임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